2021년 12월 31일
13개월 넘게 다녔던 회사를 그만뒀다.
실용음악과에서 작곡을 전공하여 단편영화, 웹드라마, 광고 등의 영상에 알맞은 음악을 제작하는 작곡가로서 활동을 하며 흔히 이야기하는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예술인들의 커뮤니티를 떠돌며 일을 구하고, 지인을 통해서, 입소문으로, 한 건, 한 건 작지만 소중한 커리어를 쌓아갔다.
비록 수입은 적었으나 그래도 다른 동기들에 비해 "나는 음악으로, 내가 제작한 음악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살아가던 도중.
예전에 일을 도와드렸던 작곡가 형님으로부터 일자리 제안을 받게 되었다.
아마 이러한 제안을 주신 이유는
첫 번째, 음악과 관련된 플랫폼 사업을 구상하고 계셨기 때문에, 현업에서 일하면서 음악 생태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내가 사업을 아이템을 잘 이해할 것이라는 점.
두 번째, 이전에 함께 일을 하면서 보여드렸던 일처리 능력이 마음에 드셨다는 점.
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처음 제안을 들었을 때는 설레고 두근거렸던 감정이 컸다.
형님은 내가 동경할 수밖에 없는, 음악계의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신 분이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1등을 하고, 성공을 이루었던 사람의 곁에서 일을 한다면
비록 음악을 만드는 일이 아닐지라도 분명 배울것이 많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겐 그 무엇보다도 과분한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온전히 음악에 집중하고 싶은 시기에, 사업에 참여하게 되면 음악과 멀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첫 째.
왜 나한테 이런 과분한 기회가 오는 것일까? 하는 불안감이 두번째였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그 이후로도 대표님의 계속된 설득이 있었고 결국 스타트업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13개월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만큼 정신이 없었다.
결국 음악과 멀어졌지만, 회사의 입장에서 비록 작지만 유의미한 성과들이 생기고 있었다.
회사에서 내가 주로 맡았던 일은 기획이었지만, 스타트업 답게 한가지 일만 맡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기획뿐 아니라 컨텐츠 제작 편집, 광고에 들어갈 음악 제작.
시간이 흘러가면서 채용관련 프로세스 진행, 인력 관리, 워드프레스를 사용한 웹사이트 제작 및 관리를 진행했고, 웹사이트 유지보수의 경우 알지도 못하는 html을 단어로 일일이 검색하여 수정하는 일도 진행했었다.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하기로 방향을 굳히면서 애플리케이션 컨셉 기획, 설계 부분을 담당하면서 설계도 제작까지 전반적인 부분을 모두 담당하게 되었었다.
이러한 일들을 진행하면서 보였던 성과로는 청년 창업 사관학교 선정, 다수의 창업 경진대회 수상, 투자 유치등의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
이후, VC로 부터 연락을 받아 PT할 수 있는 기회들을 얻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 받았던 여러 피드백을 바탕으로 앱 제작에 들어가면서 더욱 긍정적인 약속까지 이끌어냈다.
퇴사 이후로는 대학교, 엔터테인먼트, 기업, 콘텐츠 제작사와 MOU를 체결하고, 엑셀러레이팅, 추가 투자등을 유치에 성공했다.
음악을 하던 사람이 스타트업에서 뭐 얼마나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했냐고 물을 수 있다.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음악만 알던 사람이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동안 최선을 다했고, 최대한 결과물을 내려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하면서 긍정적인 부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을 진행 할 때마다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보장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스타트업의 현실, 안전빵이라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사소한 결정 하나에 회사의 존립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기획이라는 것은 그냥 말뿐인 허울이라는 걸 하루하루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다.
내가 개발을 할 수 있었다면.
말뿐인 기획이 아닌 실제로 구현할 수 있었다면.
직접 데이터를 가지고 보장된 결과를 만들어 대표님을 설득할 수 있었다면.
조금 더 과감하게 방향을 결정하고 또 결과물을 쌓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이야기되고 번뜩였지만 개발자가 없는 스타트업이었던 우리는 리스크에 대해 생각해야 했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어도 좋은 개발자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 했어야 했다.
또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기획, 세상에 없는 아이템의 경우엔 사전 수요조사조차 할 수 없는 현실들을 마주해야 했다.
그 모든 어려움의 이유는 개발자가 없어서였다.
이러한 점을 직접 체감하면서 개발을 배워야겠다라는 마음은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퇴사하기 전에 개발이사님께서 합류하셔서 기획이 현실화되고 결실을 만들어가고 있었으나 나의 퇴사는 이미 굳어진 후였다.
내가 개발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매우 필연적이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딜레마들을 해결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곡을 쓰면서, 회사를 다니면서 끝없이 이어졌던 질문, 회의감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었다.
또한 곡을 쓰면서 느꼈던 재미와 성취감을 개발하면서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작곡과 개발을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주어진 샘플들을 가지고 활용, 응용하는 작곡.
주어진 코드들을 가지고 활용, 응용하는 개발.
음악이 만들어지는 순간까지 무수히 고민들이 쌓이고 엄청난 스트레스가 밀려오지만 곡이 만들어지는 순간 성취감으로 치환되며 잊을 수 없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접히는 순간도 무수히 많다.
개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2021년 12월 31일
회사를 그만두고
2022년 4월.
개발을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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